2014년 5월 29일 목요일 (4일차)




전날 밤 퇴근길

동네 슈퍼 앞에 앉아 깡맥주 한캔 하는데 갑자기 맛있는 음식들이 눈앞에 떠올랐다

퉁퉁한 구운 고등어를 곁들인 따뜻한 물에 만 찬밥이 너무 먹고싶었다

따끈한 흰 쌀밥에 명란젓을 숟가락 등으로 뭉개어 비벼서 먹고싶었다

하지만 꾹 참았다

맥주 한캔 마시고 집에 들어가서 물김치 쪼가리 먹고 참았다


여기까지가 3일차까지의 이야기였다





그러나 오래 참을 수는 없었다



난 결국 간밤에 잠결에 통닭을 두조각 먹고 말았다

통닭을 본 순간 채식을 하는 것조차도 잊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통닭을 두조각 먹고서는 뒤늦게

'아 맞다 나 채식 중이었지.... 실패다 ㅠㅠ 아'

라고 깨달았다.

하지만 순간의 실수로 채식의 나머지 날을 그만두는 것은 너무 나약한 포기 같아서 계속 채식을 이어가기로 했다.

그리고 난 컴퓨터를 켜고 글을 썼다





그래

다행히 꿈이었다

얼마나 먹고싶었나 꿈까지 꾼다.





4일차 목요일의 하루가 시작되었다



장가도 안간 못난 아들은 아침밥상을 받았다

완벽한 채식이다


날이 갈수록 아버지의 불만이 장난이 아니다

어머니는 나의 도전에 아주 적극적으로 협조를 해 주시고 계신다




외할머니께서 아주 어릴때부터 80세가 넘으신 지금까지 일평생

고기는 물론 생선도 우유도 안드시는 비건 채식주의자시다.

어릴 때 소 도축하는 장면을 보시고 트라우마 때문에 채식을 결심하시게 된거다.


그 뒤로 외할머니께선 밖에서 식사를 하시는 경우를 대비하여 항상 고추장 하나를 지니고 다니신다 한다.

그래서 경로당에선 외할머니를 '고추장 할머니' 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런 외할머니 아래에서 자라오신, 거기다 8남매 중 외할머니와 가장 흡사한 성향의 어머니 또한

외할머니와 아주 비슷한 식성을 가지고 계신다.

물론 요리를 어머니께서 거의 하시니 우리집 식단도 채식 위주의 식단이었다.


어머니와 정반대의 입장에서 똑같은 성향을 가진 아버지와 나는 그게 늘 불만이었다

아버지와 나는 고기를 좋아한다. (애주가라서 당연히 더 그렇고)

그래서 보통 가족들 각자 밖에서 해결하는 저녁식사의 경우는 아버지나 나나 당연히 육식이다

지글지글지글지글 



근데 영원한 식성 우방이었던 큰아들이 갑자기 일주일간의 극단적 채식을 선언했고,

어머니께서는 두손들어 반기며 지원해주시는 상황

아버지께선 밥상이 풀밭으로 변한것에 대한 불만 이상으로

왜! 집안의 가장인 아버지가 아닌 큰아들 위주로 식단이 돌아가느냐. 이것에 대해 불만이 더 많으신 것 같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버지 조금만 더 참으세요.



보통은 멸치와 함깨 볶는 고추인데 멸치가 빠졌다

이렇게 맛있을 줄이야

식감으로 보나 맛으로 보나 오늘 아침식사의 메인은 고추볶음이다







육식 예찬론자도 이것 앞에선 보통 무릎을 꿇게 마련인 호박잎







이번주 내내 함께하는 러닝 메이트들. (사진에 없지만 물김치까지)





이정도 식단이면 채식을 하는 불만은 전혀 없다

충분히 맛있고 충분히 배부르다


아무리 풀쪼가리들이라도

눈앞에 다양한 요리방법으로 푸짐하게 기름지게 한상 차려져 있으면 아무런 불만이 없다

그게 고기든 뭐든 맛있어보이는 음식이 내 앞에 있다. 이것은 인간에게 어떤 스트레스도 주지 못한다.



누차 말하지만 채식을 하기 전에 짐작하는 채식의 고통(?)과 막상 시작한 뒤 느끼는 고통(?)은 다르다


흔히 채식을 하며 겪는 고통을 말하자면

걍 무작정 졸라 배고플 때. 먹을거 땡길 때. 이럴 때 일차적으로 떠오르는 음식이 보통 고기 종류일 경우가 잦다는 거.

그리고 눈앞에 고기 있을 때. 남들이 그 고기 먹을 때. 이때는 진짜 미친다.


이 고통들은 상상을 초월한다. 돌아버릴 지경이다.

하지만 이 고통은 시간이 지나며 채식에 익숙해지면 사라질 고통이다.



근데 막상 닥치면 위보다 더 난감할 경우가 아래의 경우다.


밖에 나가있는데 밥때 되어서 식당을 찾을 때.

딱히 집에 먹을것도 없고 출출한데 간단하게 라면한그릇 먹으면 딱 좋겠다 싶을 때.

술약속을 잡고 술안주를 고를 때.


보통의 사람들이 먹는 음식엔 대부분 동물성 재료가 조금씩이라도 들어가 있다는거

그래서 맘놓고 먹을 수 있는 게 없다는 거.


이런 경우는 위의 강렬한 정신적 고통이라기보다는 그냥 꾸준한 불편함에 속한다.

해결하면 어떤식으로든 해결을 하면 하는데, 이 지구에서 보통사람들 틈에서 섞여사는 이상 평생 불편하다.

이 부분이 진짜 채식의 불편함이다.




아침밥은 잘 해결하고 집을 나섰다.



오전에 친구 만나서 볼일 좀 보고 점심을 먹으려고 식당을 찾는데 또 난감하다.

원래 목요일 오전마다 만나서 같이 볼일 보고나서 함께 점심 먹는 친구인데

늘 짬뽕, 햄버거 이런거를 먹었더랬다.




근데 아

이번주는 그게 안된다


친구가 차도 몰고 나왔고

나도 왠지 대구에 이거 하나쯤은 있을법하다 싶어서

네이버 검색찬스를 써 본다

'채식 식당'


아 다행히 일터에서 지하철 한정거장 앞에 채식 식당이 있었다

채식을 통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된다.




채식식당 러빙헛

세계적으로 많은 프랜차이즈가 있는 채식단체였다




들어가니 고운(!) 얼굴의 아주머니 한분이 맞아주신다.

위에서 언급한 우리 외할머니도 그렇고

채식만 하시는 분들의 얼굴은 뭔가 채식 스럽게 생겼다

튼튼해 보이지 않지만(?) 건강하게는 보이는(!) 깨끗하고 희고 마알갛고 얇아보이는 피부

어딘가 온화한 표정

스님의 얼굴 같다고 해야하나




가게 안에는 묘한 음악과 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벽의 선반에는 채식 관련 음식들이 잔뜩 디스플레이 되어 있었다


콩고기, 콩스테이크, 콩버거, 밀고기, 채식라면 등등

사진 잔뜩 찍었는데 아직 폰에서 안꺼냈다

그냥 그런게 있다



콩고기야 어릴때부터 접해와서 신기할 것도 없었지만

오뎅처럼 생긴 고기가 있었는데 그 고기가 정말 신기했다

그게 바로 밀고기인데, 가열하여 조리하면 닭고기처럼 결대로 찢어진다

그거는 닭고기 대용 음식이다. 그걸로 백숙도 만들 수 있다고 하더라.


태어날 때부터 채식만 해왔다면 몰라도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고, 고기맛을 들인 사람이 채식을 하면 고기에 대한 욕구가 영원히 따라오나보다

그러니까 고기를 흉내낸 페이크 고기가 있는 것 아니겠나

고기도 아마 담배처럼 평생 참는거겠지





아주머니께서 내가 채식을 하는 '뻘스러운' 이유를 들으시고는 굉장히 의아한 표정을 지으셨지만

이내 좋은 일 하는거라고 칭찬해 주신다




윤리적 채식의 근거는

단순히 내 입에 집어넣는 이 고기가 원래 갖고있던 생명을 빼앗지 말자는 그런 단순한 살생금지의 논리보다

좀 더 심오한 논리로 전개된다


공장식 사육의 잔인함

고기에게 먹일 사료의 재배지를 확보하기 위한 밀림 개간


등등


'맛의 달인' 이라는 만화책을 읽다 알게 된건데

공장식 사육 닭들의 경우에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빛을 보는 순간은 도축당하러 가는 트럭에서가 전부라고 한다

빛이 있으면 움직임이 많아서 살이 빠지고 서로 싸우면서 죽을까봐.

그런 열악한 사육 환경에서 극도로 받는 스트레스로 인한 폐사를 방지하려 닭에게 항생제를 잔뜩 먹이고.



뭐 이런 것들이 모두 윤리적 채식을 할 근거랄까.



물론 이것을 무조건적으로 비도덕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왜냐. 이런 어느정도의 윤리적 희생을 감내하는 과정이 없다면

우리는 통닭 한마리를 5만원씩 주고 사먹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결국 돈이다.


우리는 뭐든지 비싸다고 툴툴대면서 또 어디서 뭔 얘기를 들으면 또 잔인하다 툴툴댄다

모순이지


뭐 이쪽도 맞고 저쪽도 맞다

아니 이쪽도 틀리지 않고 저쪽도 틀리지 않다





주문을 하고 음식을 기다리고 있는데

주방에서 콧노래가 들린다

아주머니의 콧노래

진짜 즐거워 보이는 콧노래다


나도 장사하는 입장이지만 저렇게 즐겁고 행복하게 장사하기가 쉬운 일은 아닌데

뭔가 놀라움을 넘어서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이 순간이 채식식당에서의 시간 중 가장 강렬한 기억이다)

자신에 대한 반성도 되고







음식이 나왔다






이것은 들깨탕이다

친구가 먹었다

담백하더라





이것은 내가 먹은 볶음우동이다


백퍼센트 식물성 재료다










아 초대박이다

정말 맛있다

채식 4일간 기름진 음식을 거의 못먹었는데

채식 식당에서 채식요리에 도가 튼 전문가의 전혀 채식같지 않은 채식을 접하니 신세계다

아 이건 채식의 카테고리를 떠나서 그냥 정말 맛있는 음식이다

맛있는 채식이 아니라 맛있는 음식











싹싹 비웠다

아주 밥상 위에서 설거지를 했다


너무 맛있어서 아주머니한테 감사하다고 정말 잘먹었다고 몇번을 인사를 하고 나왔다

명함도 챙겨왔다





대구 경신고등학교 바로 맞은편

'러빙헛' 이라는 채식 식당이다

대구 분들은 경험삼아서라도 한번쯤 꼭 가보시길 권한다

가격대도 그냥 일반 음식점과 비슷한 가격대다


들깨탕은 8000원, 볶음국수는 6000원

다른 메뉴도 다 요정도 가격대다



그리고 채식 통조림 등 식재료들도 판다

나도 콩고기 1킬로 사서 친구랑 반 갈랐다




배부르게 먹고 출근해서 열심히 일하고 퇴근

가게에서는 아무것도 안먹었다


퇴근길

술을 좋아하는 술쟁이인 나는 퇴근길 술약속을 잡고싶었다

그리고 늘 그랬듯 또 누군가가 술을 먹자고 연락을 해 왔고 난 덥썩 물었다


하지만 이내 약속이 파토났다

다른 급한 일이 생겼다며 파토가 났다

어디까지나 내 예상인데, 내가 파전집밖에 못간다고 하니 망설이다 다시 전화와서 취소한 것 같다

고기를 먹고싶었나보다



쓸쓸히 집에 들어왔다









거실에 들어오니 소파 위의 아버지께서 뭔가 굉장히 오묘한 표정으로 웃으시며 말씀하신다








주방에 양념통닭 있는데 좀 먹지???











아......

아버지.......



치킨 상자에 코를 박고 냄새만 맡았다

아....


내일 하루만 더 견디자....





- 4일차 끗 -







,